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횡성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전 상황 == 1951년 1월, 유엔군은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명령에 의거해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 중공군이 물러난 지역을 접수하며 순조롭게 전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2월에 들어와 [[횡성]]과 지평리 일대에서 전선을 정리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라운드업 작전이 개시,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한데 점차 적의 저항이 강해지며 진격이 무뎌지기 시작하면서 횡성과 지평리 두 곳에 돌출된 전선을 형성했고, 이렇게 진격이 무뎌진 미군과 한국군을 노리고 중공군의 대공세, 이른바 중공군 4차 공세가 펼쳐지게 된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공세를 격파하기 위해 골몰하던 중,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진격한 유엔군 병력이 톡 튀어나온 걸 보자 이들을 잡아먹기 좋은 절호의 먹이로 판단했다. 당시 펑더화이는 라운드업 작전으로 돌출된 지평리 일대의 미군과 횡성 일대의 한국군을 놓고 어느 쪽이 격파하기 더 좋은 먹잇감인지 골몰했고, 횡성과 지평리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에 대해 중공군 수뇌부 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머릿수는 더 많아도 약체란 점 때문에 횡성이 우선 목표가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일대에서 돌출된 한국군 8사단을 격파해 커다란 구멍을 만든 후 유엔군의 측후방을 유린하는 공격작전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중공군 공세의 가장 첫 목표는 한국군 8사단이 되었다. 당시 횡성 일대에 있던 한국군은 공격작전 중이라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마련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공세를 우선하다 보니 부대간에 촘촘한 방어선조차 꾸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한국군 8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 사이에 빈틈이 많이 생겨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단과도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왼쪽, 오른쪽, 옆구리까지 비워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작전계획 상 제대로 된 예비대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캄캄한 밤이나 새벽을 틈타 홍천 방면에서 연결되는 산악 능선을 타고 이미 다수의 중공군 병력이 횡성 일대에 잠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중공군의 공세가 몰아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